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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2015년 광명시 사회적 경제 기업 워크숍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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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광명시 사회적 경제 기업 워크숍 보고

사회적 경제 보고! 느끼고! 배우고!”

 

주최 : 광명시 일자리창출과

일정 : 2015513() ~14()

장소 : 원주시 사회적경제 네트워크 무위당 기념관, 협동광장, 사회적기업 행복한 달팽이, 횡성자연휴양림

참석 : 두꺼비산들학교협동조합 민들레 참석

참석기업 : 두꺼비산들학교협동조합심포니오케스트라엑스컴 정보통신부모사랑 노인복지센터오아시아(카페). 행원늘푸른가게구름산협동조합다살림협동조합등대생협협동조합온나라협동조합광명시 공무원 5.

 

[보고]

1. 원주시 사회적경제 네트워크의 역사 그리고 현재

- 원주시는 사회적경제의 역사가 깊은 곳이라 각 지역의 사회적경제팀들의 방문과 교육이 많은 곳이다. 특별히 협동조합 해설사라는 역할을 따로 할 인원이 있을 정도이다.

-협동조합 해설사가 마치 관광 가이드를 하듯이 강의를 안내하고 원주 시내의 사회적기업 안내를 해 주었다.

1) 1: 원주의 사회적 경제 역사 (강사 : 원주시 의료생협 사무국장)

1: 1965~ 1977년 무위당 장일순(1928~1994. 교육운동. 민주화운동. 생명운동) 선생과 지학순 주교가 원주에서 만나 생명의 세계관, 협동적 생존권 확보를 위한 운동의 일환으로 학교를 세우고 마을 주민들이 조합원이 되어 투자하고 마을 주민을 위해 금융사업을 하는 신용협동조합운동을 시작한 것이 원주사회적경제 운동의 시초이다.

2: 1977~1985년 원주소비자협동조합(한살림 협동조합의 전신)

3: 2003~현재 / 20036. 6개의 협동조합(신협, 한 살림협동조합 등)과 나눔의 집, 자활수견기관이 함께 사회적경제 협의회 구성. “지역을 중심으로 스스로 경제운동을 해보자는 취지로 확대. 분할. 생성을 통해 현재 27개 팀 참여. 현재 원주는 원주시 관광부의 사업으로 협동조합 광장을 만들고 사회적경제를 하나의 관광사업으로 진행하고 있다.

 

2) 2: 협동 광장 방문 및 교육 (강사 : 원주시사회적경제 네트워크 사무국장)

- 협동 광장- 도심 지하상가를 협동광장으로 내어줌. 예전에는 길을 건너는 통로였는데 지상으로 횡단보도가 생기면서 사람의 통행이 뜸해 졌다. 그 공간을 협동 광장으로 만들어 네트워크 사무실 및 교육 공간 등으로 사용한다. 예전 상가라 공간이 아직 많이 남아있는데 빈 곳이 많아서 좀 의문이 들었다. 사회적 기업이나 마을기업 등이 들어와 활성화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없어서 질문은 못함..

- 사회적경제 네트워크의 역할- 사업의 협력/ 교육/ 기금마련 등

-사회적 경제 네트워크라고 해서 그 틀에 얽매이지 말고 틀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지역의 특성에 맞는 단체와 함께 구성하는 것이 좋다. (원주는 종교법인 내 나눔의 집이나 자활후견기관도 네트워크에 포함되어있다)

- 협력의 사례 : 신협과 의료생협이 서로 상호출자를 통해 상생을 유지한다.

- 고민의 지점 : 대표자간 협력이 조합원 모두에게까지 이어지는 소통의 문제

 

3) 3: 사례발표 (원주시 사회적 기업 식당 행복한 달팽이 운영 사례

-강사 행복한 달팽이 대표)

- 사업의 방향 ; 학교급식과 지역 농업(농산물) 연계/ 지역의 생산물로 식당 운영 및 결식아동 도시락 사업

-처음 식품 가공 사업을 시작했으나 실패. 반찬사업을 다시 시작해 행복한 달팽이 (2개 지점)로 확장. 특이한 점은 일반 상가에 있는 식당이 아니라 근로자복지회관 구내식당에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다. ~금요일까지 근로자복지회관 근무자들 및 일반인, 관광객들이 식사를 한다. 점심값은 4000. 결식아동들에게는 일주일치 반찬을 챙겨 집집마다 배달하고 있다.

-원주푸드협동조합에서 하는 사업으로 조합원은 28명이고 그 중 농민이 13. 단체가 12단체. 직원 3명으로 구성되어있다. (실제 일하는 직원은 모두 10. 7명은 비조합원)

-결식아동들에게 급식카드가 지급되는데 과연 그 카드로 건강한 식생활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급식카드는 대부분 편의점에서 많이 사용된다. 영양부족과 결핍을 초래하는 결과이다. 결식아동에게 건강한 먹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고민하다 반찬 배달 사업을 시작. 지자체와 기업의 후원으로 진행된다.

-행복한 달팽이에서 점심을 먹었다 (4000) 밥과 국, 돼지고기 불고기, 나물 등 맛있었다

 

2. 횡성자연휴양림

1). 저녁식사(횡성 한우 및 행원에서 준비한 밥과 나물 등 반찬, ) 및 소개 그리고 회의

-저녁 식사 후 참여한 팀 소개 : 두꺼비산들학교협동조합. 심포니오케스트라. 엑스컴 정보통신. 부모사랑 노인복지센터. 오아시아(카페). 행원. 늘푸른가게. 구름산협동조합. 다살림협동조합. 등대생협협동조합. 온나라협동조합. 광명시 공무원 5.

- 광명시 사회적 경제 네트워크 추진 회의

-지금 일자리창출과에 함께 있는 사회적경제지원센터가 소하동 새싹 어린이집 장소로 이전한다. 책상하나에서 건물 공간으로 확대 편성될 예정..

-사회적경제지원센터가 이전되면 광명시 사회적경제네트워크의 공간 및 회의 및 교육공간이 생길 예정이다. 우리도 이용 가능~

-광명시 사회적경제네트워크 출범은 올 해 7월로 예정하고 있다. (7월이 사회적경제의달)

-광명시 내 사회적기업, 마을기업, 협동조합이 서로 협력하고 상생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네트워크의 역할..

-여러가지 실행을 위한 어려움들이 있지만 센터의 이전 및 센터장의 적극적인 지원 등이 다른 지역과 달리 장점이 될 수 있다.

 

2). 횡성 자연 휴양림 숲해설 (14일 오전 프로그램)

- 호명산 자락에 있는 사설 휴양림. 규모도 있고 계곡도 좋고 산책하기에 좋다. 호명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어 조금 깊은 숲으로 들어가는 것도 가능하다. 오토캠핑장 및 숲 속의 집이 있다. 두꺼비산들학교협동조합 소개를 듣고 재미난숲 운영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재미난숲처럼 진행하고 싶은데 운영 방법등에 대해 조언을 구하고 싶다고.. 두꺼비산들학교로 한 번 방문해서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해서 그러시라고 했다. 우리의 겨울엠티 장소로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들살이도 한 번 생각해 볼 만한 장소이다. 광명까지 거리가 좀 문제이긴 하다. 올라오는 길이 조금 막혀서 약 2시간 30분쯤 걸린 듯..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삶]

1928. 1016일 강원도 원주시 평원동에서 부친 장복흥(張福興)과 모친 김복희(金福

)사이에 6남매 중 차남으로 출생. ()는 호암(湖岩)이었으나, 60년대에는 청강(靑江)으로, 70년대에는 무위당(无爲堂)으로, 80년대에는 일속자(一粟子)로 바꾸어 씀.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 여운(旅雲) 장경호(張慶浩) 밑에서 한학을 익히는 한편 생명공경의 자세를 배움. 묵객으로 할아버지와 절친하던 우국지사 차강(此江) 박기정(朴基正)에게서 서화를 익힘.

1940 원주초등학교 졸업. 천주교 원동교회에서 세례명 요한으로 영세를 받음. 서울로 유학.

1944 배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공업전문학교(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신)에 입학.

1945 미군 대령의 총장 취임을 핵심으로 하는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이른바 국대안)에 대한 반대 투쟁의 주요 참여자로 지목되어 제적.

1946 서울대학교 미학과(1)에 입학.

1950 6.25 동란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원주로 돌아옴. 이후부터 줄곧 원주에서 생활.

1954 도산 안창호 선생이 평양에 설립한 대성학원의 맥을 계승한다는 뜻에서 대성학원을 설립. 이후 5년간 이 학교의 이사장으로 봉직.

1955 봉산동에 손수 토담집을 지어서 살기 시작함.

1956 무소속 국회의원에 입후보하였으나 낙선.

1957 이인숙(李仁淑)과 결혼. 슬하에 3남을 둠.

1960 사회대중당 후보로 다시 국회의원에 출마하였으나 극심한 정치적 탄압으로 낙선.

1961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평소 주창하던 중립화 평화통일론이 빌미가 되어 서대문 형무소와 춘천 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름.

1963 출소 후 다시 대성학원 이사장에 취임하였으나, 한일 굴욕외교 반대운동에 연루되어 이사장직을 박탈당함. 정치활동 정화법과 사회안전법 등에 묶여 모든 활동에 철저한 감시를 받기 시작함.

1964 이 해부터 몇 해 동안 포도농사에 전념.

1968 피폐해진 농촌과 광산촌을 살리고자 강원도 일대에서 신용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함.

1971 10월에 지학순 주교 등과 함께 박정희 정권의 부정부패를 폭로하고 사회정의를 촉구하는 가두 시위를 주도. 이 시위는 70년대의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촉발하는데 큰 역할을 함. 이후부터는 민주화 운동을 막후에서 전개.

1973 전 해 여름에 닥친 큰 홍수로 수해를 입은 지역을 복구하기 위해 지학순 주교와 함께 재해대책사업위원회를 발족. 민청학련사건에 연루된 구속자들의 석방을 위해 당시 로마에서 주교회의를 마치고 일본을 경유해 귀국을 준비하던 지학순 주교와 함께 국제사회에 관심과 연대를 호소.

1977 "종래의 방향만으로는 안되겠다고 깨닫고" 지금까지 해오던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공생의 논리에 입각한 생명운동으로 전환할 것을 결심.

1983 민주세력을 결집시켜 통일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민주통일 국민연합>을 발족하는데 일조함. 1029일 도농직거래조직인 <한살림>을 창립하고,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생명운동을 전개.

1988 한살림 운동의 기금조성을 위해 <그림마당 민>에서 서화전 개최. 다섯 번에 걸쳐 전시회를 가짐.

1989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선생의 뜻을 기리고자 원주시 호저면 송곡(松谷)에 비문을 쓰고 기념비를 세움.

1991 지방자치제 선거를 앞두고 <참여와 자치를 위한 시민연대회의>를 발족하는데 고문으로 참여. 614일 위암으로 원주기독병원에서 수술.

1992 생명사상을 주제로 한 강연 다수.

1993 노자의 도덕경을 생명사상의 관점에서 풀이한 장일순의 노자이야기(다산글방)를 이현주 목사의 도움으로 펴냄. 9월에 병세가 악화되어 재입원. 1113일 민청학련 운동승계 사업회로부터 투옥인사들의 인권보호와 석방을 위해 애쓴 공로로 감사패를 받음. 평생의 동지였던 지학순 주교의 정신을 잇기 위해 <지학순 주교 기념사업회>의 결성을 병상에서 독려.

1994 522일 봉산동 자택에서 67세를 일기로 영면.

1997 녹색평론사에서 장일순 선생님의 이야기를 모은 나락 한알 속의 우주를 펴냄

1998 상지대학교 전시관에서 장일순 유작전이 열흘간 열림

2001 7주기를 맞이하여 원주 시립박물관 주최 무위당 선생 기획전시회를 두 달 동안 열음.

2004 10주기를 맞이하여 토지문화관과 원주가톨릭센터, 원주시립박물관 일원에서 추모행사가 열림. 최성현이 쓴 <좁쌀 한 알>이 도솔출판사에서, 최종덕이 편집한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가 녹색평론사에서 출간됨.

2007 96일 무위당 선생의 사상적 유산인 원주밝음신협 건물 4층에 <무위당 기념관>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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