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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산 참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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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은 단군께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강화의 들녘과 서해가 눈 아래 펼쳐지는 해발 468m의 마리산(마니산) 정상에 자리 잡고 있다. 기초는 하늘을 상징하여 둥글게 쌓았고 위의 단은 땅을 상징하여 네모로 쌓아서 하원상방형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천원지방(天圓地方)’의 형상은 우리 선조들의 우주관을 반영한 것이다. 제사를 지내는 사람까지 포함하면 천. 지. 인 삼재가 한자리에 구현된 천지인합일(天地人合一)의 원리를 조형한 제천단이다. 크기는 면적 5,593㎡, 상단 방형(方形) 1변 길이 1.98m, 하단원형 지름 4.5m이다. 사적 제136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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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은 상고시대에 단군이 쌓았다고 전하여 온다. 자연의 산석(山石)을 다듬어 반듯하고 납작하게 만들어 쌓았고, 돌과 돌 사이에는 아무 접착제도 바르지 않았다. 자연석에 의지하여 아래는 둥글게 쌓은 하원단(下圓壇)과 위는 네모반듯하게 쌓은 상방단(上方壇)의 이중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방단 동쪽면에는 21계단의 돌층계가 설치되어 있다. 높이 5.1미터, 너비 16평 정도의 공간에 돌로 쌓은 제단이 위치하고, 한 쪽으로는 향로가 놓여 져 있다. 국가의 중요 행사가 열릴 때 향로에 불을 지펴 칠선녀로 하여금 그 불을 이전하게 했다고 한다.

참성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게 된 것은 마니산이 그만큼 정결하며 장엄하고 뛰어난 여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강도(江都 : 江華)는 위치적으로나 생김새가 천하의 요새로 되어 있고 예부터 문물이 발달하였으며, 마니(摩利)·혈구(穴口) 등 하늘과의 인연이 깊다고 예로부터 일러 왔다.


참성단을 조성한 연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보수 또는 수축한 기록이 곳곳에 있다. 참성단에 관한 가장 오랜 기록은 고려 원종 5년 (1264년)에 왕이 친히 이곳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다.  또 "고려사" 는 참성단을 두고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낸 단으로 전한다 " 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미뤄 원종 이전에 이미 참성단이 설치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원종 11년(1270년), 조선 인조 17년(1639년), 숙종 43년(1717년)에 단을 보수한 기록으로 보아, 조선 후기까지 이곳 참성단에서 제천의식이 행하여 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숙종 때의 보수 내력은 참성단 동쪽 등산로에서 50m 정도의 거리에 있는 <참성단 중수비>에 당시 강화 유수였던 최석항(崔錫恒)이 높이 5m에 폭 3m의 자연석에 기록하여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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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 소개된 사서(환단고기 단군세기)에 따르면 단군 51년(BC 2283년)에 운사(雲師) 배달신(倍達臣)에게 명하여 장정 8000명을 동원하여 강화도 정족산에 삼랑성(三郞城)을 쌓고, 마니산에 하늘에 제사지낼 참성단을 쌓게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단군께서 3년 뒤에 직접 이곳에 와서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참성단은 남북한을 통틀어 가장 오래된 단군 유적으로 알려져 있으며, 강화를 제외한 남한의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각별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참성단과 유사한 유적으로 인근에 있는 삼랑성(三郞城 : 정족산성)에 관한 기록이  있다.  삼랑성은 강화에 있는 또 하나의 단군 유적으로, 『환단고기』에는 단군께서 명을 내려 쌓았다고 전해지는 산성이며, 『고려사』에 나오는 관련 기록으로는 ‘단군이 세 아들로 하여금 쌓게 했다.’는 대목이 나타난다.

이 참성단에 관련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신단실기(神檀實記)』는 『동사(東史)』를 인용하여 말하기를, “마니산(摩尼山)은 강과 바다의 모퉁이로서, 땅이 한적하고 깨끗하고 조용하고 깊어서, 신명(神明)한 자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사지내는 자리를 만들어서 상제께 제사지낸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고려사(高麗史)』에 고구려 유리왕 19년에 사슴과 돼지를 잡아놓고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을 비롯하여, 여러 문헌을 통해서도 국가 차원의 제사가 조선조 말까지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국가제사의 제단으로도 활용되어, 임시로 드리는 제사(臨時祭)와 정기적으로 드리는 제사(定期祭)의 제사가 행해졌다. 임시제사는 가뭄이나 전쟁 같은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해 치러진 것이며, 정기제사는 4월과 8월에 거행되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마리산에 얽힌 천제의식 및 상제문화의 흔적들이 여러 문헌에서 나타난다.

고구려 19대 광개토경평안호태황(361년)은 순찰할 때에는 마리산에 올라 친히 삼신께 제사를 드렸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을지문덕 장군은 해마다 3월 16일에는 강화 마리산으로 달려가 제물을 차려 경배하였고, 돌아와서 10월 3일에는 백두산에 올라 하느님께 제사를 올렸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종이 이곳까지 거동하시어 승지로 하여금 이곳 사당 밑에 있는 제궁에서 쉬면서 초례를 봉행하였다. (『동국여지승람』)

인조 17년(1639)에 마리산 참성단을 수축하고 사당을 세워 삼신에게 제사를 올렸다. (『강도지(江都志)』)

역대 제왕들 뿐 아니라 나라의 관리와 장수들도 참성단에서 태평성대를 기원하며 상제님께 제를 올렸다. 이순신 장군이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도 나라의 안녕을 위해 참성단에서 제를 올렸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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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 중수비

마리산에 위치한 참성단(사적 136)을 중수한 사실을 기록한 비이다. 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문화재자료 제13호로 지정되었다.

가파른 암벽면에 가로 50㎝, 세로 105㎝ 크기의 비 윤곽을 만들고 그 안에 8행 238자를 새겨 넣었다. 주요 내용은 당시 강화 유수 최석항 [崔錫恒, 1654~1724, 후에 벼슬이 좌의정까지 오름]이 관내를 순찰하다가 마리산에 올라 참성단이 무너진 것을 보고 선두포 별장 김덕하(金德夏)와 전등사 총섭 신묵(愼默)에게 명하여 보수한 내용을 담고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단군께서 돌을 쌓아 단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하던 곳이라 한다.


돌아보건대 수천년이 지났으니 풍우에 씻기고 깎여 서북 양면이 반쯤 무너졌고 동편 계단이 기울어져 이 고을 여러 어른들이 만나면 개탄함이 오래 되었다.


이즈음 못난 내가 이곳의 유수로 부임하여 이해 봄에 고을을 두루 살피게 되어 이 산에 오르고 분연히 참성단을 중수할 뜻이 생겨 선두포 별장 김덕하와 전등사 총섭 승신묵에게 일을 주선케 하여 다시 쌓게 하니 열흘이 채 되지 아니하여 다 마쳤다.


아~ 무너진 곳을 고치어 옛 모습을 되살리는 것은 고을을 지키는 자가 마땅히 힘써야 할 일일 진데 하물며 이곳은 우리 민족의 시조가 되시는 단군께서 당요와 같은 시대에 나시어 손수 단을 쌓아 청결히 하늘에 제사하시던 곳임에랴!

수천년 후의 후손들이 이곳을 바라보면 반드시 경건한 마음을 일으킬 것인즉 어찌 바로 고치지 않을 것인가?

신묵이 이 일의 지말을 적어 후세 사람들에게 알리기를 청하므로 이 글을 써서 남긴다.


정유(丁酉, 1716)년 단양월

행(行) 유수 최석항(崔錫恒) 기(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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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43(정유, 1717)년에 강화유수 최석항이
참성단 중수 기록을 남긴 비문으로 경사진
바위의 평평한 면에 비문을 새겼다.
참성단 동남쪽 아래 등산로에 자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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