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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이경달
부채살입니다.
어느 곳의 나뭇잎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작은 움직임을 더해주는 것이 있습니다. 내리는 비입니다.
활엽의 잎을 공중에 내딛고 있는 그들이 큰 몸짓이라면 마당에 낮은 자리의 매듭풀과 질경이는 위로 흐르는 바람 때문이 아니라 빗물에 흔들리는 몸짓입니다.
몸짓이 흔들이고 있습니다. 흔들리는 몸짓이 불안이라면 이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인간다운 몸짓입니다. 이 불안과 더불어 보이는 모습이 있지요.
부끄러움입니다.
나는 나뭇잎이 부끄러운지 모릅니다. 다만 떨구는 고개와 무게를 견디면서 내린 어깨가 그리 보이는 것입니다.
불안과 마찬가지로 부끄러움도 인간에게는 인간다움의 징표일 것입니다.
내리는 비입니다.
그리고 부는 바람입니다.
불안하고 부끄러움을 알게 하는 비와 바람입니다. 태풍의 영향권입니다.
우리는 불안하고 큰바람에 긴장하고 있습니다.
누가 저 곳에서 냇가를 막았습니다.
1톤 트럭이 지나는 산길을 10톤 트럭이 지나도록 냇가를 포크레인을 동원해서 꽁꽁 막고는 일을 끝내고는 삭 사라졌습니다.
이전에 나름대로 냇가를 잘 정돈해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짓을 하고는 사라졌습니다. 우여 곡절 끝에 본래대로 냇가를 원상복구 하였지요. 이렇게 일을 저지르는 자와 갈무리하는 자가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는 저산 어디에 심어 둔 나무를 캐어 간다고 '버릇대로' 사람을 고용하고 마무리없이 떠나간 것입니다.
어느 공단공원을 조성할 나무라고 하였습니다.
서울의 청계천은 어떤지요. 그 곳에 조경된 나무는 어떤 이력을 거쳐 그 곳에 심겨진 것인가요. 냇가를 막아 놓는 불편을 누구에게 전가하고 형식만을 청계천에 심은 것은 아닌지요. 냇가를 원상복구 하는 데에 면사무소를 몇 번이나 들락거렸습니다.
면사무소에서도 사람이 왔습니다. 막힌 냇가를 뚫기 위해 포크레인도 왔습니다.
그 날 일도 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바삐 뛰어 다녔습니다.
도회지의 가로수가 이와 같이 형성된 것이라면 잔인합니다. 잔인하고 황당한 것입니다. 왜 산골의 냇가를 이리 마음대로 보는 버릇들이 생긴 것인가요.
이 산골의 냇가를 정돈하기 위해 수십억을 들어 부었다는 말을 들었지만 산 위에서 또는 냇가를 지나 보면 이건 공사가 아니라 숫제 땜빵입니다.
돈은 돈대로 들고 냇가의 범람은 늘 가능성을 가지고 있을 뿐더러 보기에도 좋지 않습니다. 이것이 '필승 코리아'의 현주소인가 하는 자괴감이 있습니다.
공사는 돈이 되어야만 하겠지요. 가능하면 많은 돈이 되고 남은 돈도 거대할수록 그건 내용과 무관하게 그럴듯해지는 것이겠지요. 우리는 우리의 반성이 정책이나 다음 행정에 어찌 사용되는지 모릅니다. 아니 반성을 근간으로 일을 진행이나 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사업의 평가를 어찌하고 감사의 결과는 어찌 반영되고 있는 것인가요.
아마 지금의 태풍은 동일한 이유와 원리로 같은 장소에서 난리가나고 소란을 피우고 또 돈을 들일 것입니다.
목청 높이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입니다. 이런 이유를 극복하는 것으로 정부에서 FTA를 추진하고 있는가요. 곧 기업의 잔인한 구조조정결과에 소비자는 서비스가 좋아졌다는 말을 합니다.
소비자라는 말을 하였네요.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사회를 구성하는 우리도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일원이고 머릿속까지 배타적인 권리를 요구하는 무리이기도 하지요.
이 땅은 악의 땅이다 저 곳으로 떠나자. 저 곳이 없다면 마음이라도 저 곳으로.
금식하고 기도하고 춤추고 우리는 예언자의 길을 따라 떠나자.
남 아메리카 인디언의 '예언자와 그들의 삶'에 나오는 것입니다. 진저리치는 전쟁에서 탈피하려는 여망이 도덕경의 근간이 되었다고 하지요. 읽고 나서 불편케하는 글이 좋은 글이라는 '권정생'씨의 말이 있습니다. 어느 당대표의 경선에서 '색깔론'이 활개를 치는 지금에 우리에게 논의라는 것이 있고, 논의된 결과를 받아들이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염두에 둔 삶인가요. 결과를 만드는 과정이나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이 불가능한 현실이라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무엇인가요. 이런 제도를 바꾸려고 하는 '의지'는 우리에게 있는 것인가요. 우리는 무엇인가요.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 것인가요. 더구나 우리에게 할 수 있는 무엇이 남아 있는 것인가요.
그들이 편의에 의해 저질러 놓은 것을 해결하기 위해 나는 바빴습니다.
여기서 면사무소를 다녀와야 합니다. 그러니 마음과 시간과 돈이 필요합니다. 늘 예산이 없다고 하는 그들에게 몇 번에 걸쳐 설명하고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다행히 냇가를 치웠다고 해도 시비를 거는 분들이 계십니다. 덜 치웠니 더 치웠니 길이 좁아졌니 넓어졌니. 누구는 해주고 누구는 해주지 않고. 큰 물이 와 봐야 알지 뭣 하러 그런 일을 해. 시간이 남는 모양이지. 치운 냇가와 그들을 뒤로 하고 태풍이나 장마로 냇가가 넘치지 않기를 조마조마해야합니다.
우리에게 절차의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인가요. 이런 것을 궁극적으로 가로막고 있는 것이 '자본의 무한한 이동만을 보장하는 자유주의'라면 근본에 손을 댈 필요는 없는 것인가요.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지금은 보이지 않습니다. 대추리에도 비는 내리고 황새울에도 바람은 불 것입니다. 더구나 한미FTA를 반대하는 그들에게도 매일의 생계가 있습니다. 그들 위로도 태풍이 지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태풍이 남기고 가는 것 중에 긍정적인 것도 꽤 됩니다. 바다를 휘젓고 공기를 휘젓고 그리고 냇가에 넘쳐나는 비닐종류의 쓰레기를 보는 것입니다. 옛적 넘치는 물을 보기위해 다리에 섰을 때 흙탕물에 떠 내려오던 돼지가 생각납니다. 어떨 때는 초가집이 떠내려 오기도 했구요. 다리 위에서 장대에 줄을 걸고 떠 내려오는 사과를 건지던 분들이 계셨지요. 귀한 것이 뭔가 아득해진 느낌입니다. 언덕너머에 무엇이 있다는 그들의 신화가 내게도 계속 될 것 같았는데, 저 너머 무엇도 없다는 현실과 강물에 떠 내려오던 돼지를 건져 주인에게 돌려주던 것과 떠 내려오는 사과를 먹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도 이제는 물과 함께 떠내려가는 느낌입니다.
지금의 제도가 아닌 또 다른 제도가 있을 것입니다. 절제한다는 것과 고도의 훈련된 자유로운 사고가 '가로지르는 움직임을 작게 하는 삶'이지요. 무엇을 생각하고 꿈꿀 것인가요. 자기절제가 완벽한 인간이겠지요. 무엇에 기대지 않고 무엇을 핑계삼지도 않는 것이겠지요. 할 수 있는 일이라도 하지 않고 할 수 없는 것도 결과에 개의치 않는 모습이겠지요. 나라 안팤에 들리는 소문이 흉흉합니다. 일본은 군국주의로 가는 모든 발판을 마련한듯하다는 일본인의 글이 생각납니다. 죽이고 죽을 핑계만 남은 동북아시아인가요. 각각의 터무니없는 신념이 부딪히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간단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이경달
부채살입니다.
어느 곳의 나뭇잎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작은 움직임을 더해주는 것이 있습니다. 내리는 비입니다.
활엽의 잎을 공중에 내딛고 있는 그들이 큰 몸짓이라면 마당에 낮은 자리의 매듭풀과 질경이는 위로 흐르는 바람 때문이 아니라 빗물에 흔들리는 몸짓입니다.
몸짓이 흔들이고 있습니다. 흔들리는 몸짓이 불안이라면 이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인간다운 몸짓입니다. 이 불안과 더불어 보이는 모습이 있지요.
부끄러움입니다.
나는 나뭇잎이 부끄러운지 모릅니다. 다만 떨구는 고개와 무게를 견디면서 내린 어깨가 그리 보이는 것입니다.
불안과 마찬가지로 부끄러움도 인간에게는 인간다움의 징표일 것입니다.
내리는 비입니다.
그리고 부는 바람입니다.
불안하고 부끄러움을 알게 하는 비와 바람입니다. 태풍의 영향권입니다.
우리는 불안하고 큰바람에 긴장하고 있습니다.
누가 저 곳에서 냇가를 막았습니다.
1톤 트럭이 지나는 산길을 10톤 트럭이 지나도록 냇가를 포크레인을 동원해서 꽁꽁 막고는 일을 끝내고는 삭 사라졌습니다.
이전에 나름대로 냇가를 잘 정돈해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짓을 하고는 사라졌습니다. 우여 곡절 끝에 본래대로 냇가를 원상복구 하였지요. 이렇게 일을 저지르는 자와 갈무리하는 자가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는 저산 어디에 심어 둔 나무를 캐어 간다고 '버릇대로' 사람을 고용하고 마무리없이 떠나간 것입니다.
어느 공단공원을 조성할 나무라고 하였습니다.
서울의 청계천은 어떤지요. 그 곳에 조경된 나무는 어떤 이력을 거쳐 그 곳에 심겨진 것인가요. 냇가를 막아 놓는 불편을 누구에게 전가하고 형식만을 청계천에 심은 것은 아닌지요. 냇가를 원상복구 하는 데에 면사무소를 몇 번이나 들락거렸습니다.
면사무소에서도 사람이 왔습니다. 막힌 냇가를 뚫기 위해 포크레인도 왔습니다.
그 날 일도 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바삐 뛰어 다녔습니다.
도회지의 가로수가 이와 같이 형성된 것이라면 잔인합니다. 잔인하고 황당한 것입니다. 왜 산골의 냇가를 이리 마음대로 보는 버릇들이 생긴 것인가요.
이 산골의 냇가를 정돈하기 위해 수십억을 들어 부었다는 말을 들었지만 산 위에서 또는 냇가를 지나 보면 이건 공사가 아니라 숫제 땜빵입니다.
돈은 돈대로 들고 냇가의 범람은 늘 가능성을 가지고 있을 뿐더러 보기에도 좋지 않습니다. 이것이 '필승 코리아'의 현주소인가 하는 자괴감이 있습니다.
공사는 돈이 되어야만 하겠지요. 가능하면 많은 돈이 되고 남은 돈도 거대할수록 그건 내용과 무관하게 그럴듯해지는 것이겠지요. 우리는 우리의 반성이 정책이나 다음 행정에 어찌 사용되는지 모릅니다. 아니 반성을 근간으로 일을 진행이나 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사업의 평가를 어찌하고 감사의 결과는 어찌 반영되고 있는 것인가요.
아마 지금의 태풍은 동일한 이유와 원리로 같은 장소에서 난리가나고 소란을 피우고 또 돈을 들일 것입니다.
목청 높이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입니다. 이런 이유를 극복하는 것으로 정부에서 FTA를 추진하고 있는가요. 곧 기업의 잔인한 구조조정결과에 소비자는 서비스가 좋아졌다는 말을 합니다.
소비자라는 말을 하였네요.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사회를 구성하는 우리도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일원이고 머릿속까지 배타적인 권리를 요구하는 무리이기도 하지요.
이 땅은 악의 땅이다 저 곳으로 떠나자. 저 곳이 없다면 마음이라도 저 곳으로.
금식하고 기도하고 춤추고 우리는 예언자의 길을 따라 떠나자.
남 아메리카 인디언의 '예언자와 그들의 삶'에 나오는 것입니다. 진저리치는 전쟁에서 탈피하려는 여망이 도덕경의 근간이 되었다고 하지요. 읽고 나서 불편케하는 글이 좋은 글이라는 '권정생'씨의 말이 있습니다. 어느 당대표의 경선에서 '색깔론'이 활개를 치는 지금에 우리에게 논의라는 것이 있고, 논의된 결과를 받아들이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염두에 둔 삶인가요. 결과를 만드는 과정이나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이 불가능한 현실이라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무엇인가요. 이런 제도를 바꾸려고 하는 '의지'는 우리에게 있는 것인가요. 우리는 무엇인가요.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 것인가요. 더구나 우리에게 할 수 있는 무엇이 남아 있는 것인가요.
그들이 편의에 의해 저질러 놓은 것을 해결하기 위해 나는 바빴습니다.
여기서 면사무소를 다녀와야 합니다. 그러니 마음과 시간과 돈이 필요합니다. 늘 예산이 없다고 하는 그들에게 몇 번에 걸쳐 설명하고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다행히 냇가를 치웠다고 해도 시비를 거는 분들이 계십니다. 덜 치웠니 더 치웠니 길이 좁아졌니 넓어졌니. 누구는 해주고 누구는 해주지 않고. 큰 물이 와 봐야 알지 뭣 하러 그런 일을 해. 시간이 남는 모양이지. 치운 냇가와 그들을 뒤로 하고 태풍이나 장마로 냇가가 넘치지 않기를 조마조마해야합니다.
우리에게 절차의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인가요. 이런 것을 궁극적으로 가로막고 있는 것이 '자본의 무한한 이동만을 보장하는 자유주의'라면 근본에 손을 댈 필요는 없는 것인가요.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지금은 보이지 않습니다. 대추리에도 비는 내리고 황새울에도 바람은 불 것입니다. 더구나 한미FTA를 반대하는 그들에게도 매일의 생계가 있습니다. 그들 위로도 태풍이 지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태풍이 남기고 가는 것 중에 긍정적인 것도 꽤 됩니다. 바다를 휘젓고 공기를 휘젓고 그리고 냇가에 넘쳐나는 비닐종류의 쓰레기를 보는 것입니다. 옛적 넘치는 물을 보기위해 다리에 섰을 때 흙탕물에 떠 내려오던 돼지가 생각납니다. 어떨 때는 초가집이 떠내려 오기도 했구요. 다리 위에서 장대에 줄을 걸고 떠 내려오는 사과를 건지던 분들이 계셨지요. 귀한 것이 뭔가 아득해진 느낌입니다. 언덕너머에 무엇이 있다는 그들의 신화가 내게도 계속 될 것 같았는데, 저 너머 무엇도 없다는 현실과 강물에 떠 내려오던 돼지를 건져 주인에게 돌려주던 것과 떠 내려오는 사과를 먹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도 이제는 물과 함께 떠내려가는 느낌입니다.
지금의 제도가 아닌 또 다른 제도가 있을 것입니다. 절제한다는 것과 고도의 훈련된 자유로운 사고가 '가로지르는 움직임을 작게 하는 삶'이지요. 무엇을 생각하고 꿈꿀 것인가요. 자기절제가 완벽한 인간이겠지요. 무엇에 기대지 않고 무엇을 핑계삼지도 않는 것이겠지요. 할 수 있는 일이라도 하지 않고 할 수 없는 것도 결과에 개의치 않는 모습이겠지요. 나라 안팤에 들리는 소문이 흉흉합니다. 일본은 군국주의로 가는 모든 발판을 마련한듯하다는 일본인의 글이 생각납니다. 죽이고 죽을 핑계만 남은 동북아시아인가요. 각각의 터무니없는 신념이 부딪히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간단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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