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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경칩이 지났습니다. 오는 봄을 시샘하던 한파도, 그 매섭던 바람도 더 이상 어쩔 수 없나 봅니다.
하늘을 노니는 구름이 한가롭고 지나는 바람에 흙내음이 물씬 묻어납니다.
아침 출근길, 지난밤에 내린 서리가 봄볕에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자연이 그려낸 화폭을 밟으며 봄이 오는 수목원으로 출근했습니다.

천리포수목원에 봄소식을 전해주는 꽃은 '설강화'입니다. ‘Snow Drop’ 이란 꽃 이름을 우리말로 바꾼 것이지요.
겨울을 이겨낸 억척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수줍은 새색시 모습으로 봄을 연답니다.
머리를 들지 못하고 다소곳이 땅만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도 영락없는 새색시이지요.
입춘이 지나면 설강화가 피는지 수목원 가족들은 눈 여겨 꽃 밭을 살핍니다. ‘원장님, 설강화가 피었어요.’

반가운 님이 오신 듯 반기는 봄을 안고 오는 이 꽃을 맞으러 나갑니다.
이 여린 꽃이 그 무섭고 긴 겨울을 이겨내고 가장 먼저 봄을 맞다니…….
힘센 굴참나무도 아니고 호랑이 발톱을 지닌 호랑가시나무도 아닌,
이 여리고 여린 것이 가장 먼저 언 땅을 뚫고 꽃을 피운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겨울을 이기는 힘은 바로 이 부드러움에 있는 듯합니다.

설강화가 봄을 물고 오면 뒤질세라 샘을 내는 꽃이 있습니다. 꼭 우리 큰 손녀 예은이와 둘째 손녀 예진이 같습니다.
‘크로커스’입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천리포수목원의 봄소식을 전해주는 봄의 전령사입니다.
어린아이 뺨에 묻은 밥풀 같은 설강화에 비해 크로커스는 샛노란 치마를 펼치고 봄을 맞습니다.

천리포수목원의 크로커스는 세 종류입니다.
노란크로커스가 피고 지면 보랏빛 크로커스가 뒤를 잊고 마지막으로 하얀 크로커스가 봄을 마무리 합니다.
긴 겨울을 이겨내고 힘겹게 피워낸 크로커스가 열흘 남짓 봄볕과 노닐다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노라면
하나님이 야속해 지기도 합니다. "저 여린 생명에게 좀 더 많은 봄볕을 주실 순 없으신지요."
지금 천리포수목원엔 설강화와 크로커스가 연주하는 비발디의 사계 중 봄 1악장이 해무가 번지듯 펴지고 있습니다.

봄꽃을 이야기 하면 눈 속에서 피어나는 복수초의 그 단아한 모습을 떠올리실 것입니다.
천리포수목원의 복수초는 좀 게으른(?)편입니다.
항상 바지런한 설강화와 크로커스에게 봄 전령사의 자리를 빼앗기지요. 다른 지역에서 복수초가 피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열흘 가까지 지나야 천리포수목원의 복수초들은 기지개를 켭니다.
늦게 핀다하여 복수초의 아름다움마저 빼앗기지는 않습니다.
설강화와 크로커스를 모르는 사람들도 복수초 앞에서 한참을 떠날 줄을 모르니까요.

사실 리포수목원의 봄이 설강화와 크로커스로 부터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천리포수목원에는 1년 내내 꽃이 지지 않습니다.
사실이냐고요? 사실입니다.
한겨울에도 꽃이 있지요.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납매’ 입니다.
섣달에 피는 매화라 하여 섣달 ‘납’자를 써서 납매라 하지만 사실 장미과의 매화와는 다른 꽃입니다.

천리포수목원의 효자나무가 바로 ‘납매’입니다.
12월에서 2월까지 꽃을 피우지요. 꽃도 앙증맞지만 향기가 아주 좋습니다.
수목원을 향기로 가득 채우고도 남는답니다.
이 꽃을 ‘Winter Sweet’ 이라 부르는 것만 보아도 향기가 얼마나 좋은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1, 2월 눈이 내리면 방송과 언론사에서는 눈 덮인 납매를 촬영하러 수목원을 찾곤 합니다.
한 그루 납매가 넓은 수목원을 홀로 지키고 있는 게 안쓰러워
또 한 그루의 납매를 설립자이신 고 민병갈 원장님 흉상 옆에 옮겨 주었습니다.
이제 서로 의지하며 든든하게 한 겨울을 잘 지켜 주리라 믿습니다.

납매뿐만 아니라 가을벗나무와 중뿔남천, 풍년화가 겨울부터 이른 봄까지 천리포수목원을 꽃동산으로 만들고 있으며
호랑가시나무와 카사미아, 낙상홍이 홍보석 같은 빨간 열매를 달고 있지요.
그래서 천리포수목원엔 한 겨울에도 꽃과 열매가 달려 있을 뿐 아니라,
이들을 노리는 새들이 한겨울 수목원을 떠나지 않고 지키고 있답니다.
꽃과 새들의 세상이지요…….
금년에도 풍년화가 흐드러지게 피었으니 분명 풍년이 올듯합니다.

금년 봄에 수많은 식구들을 새로 맞았습니다.
큰 저수지 주변으로 150여 품종의 꽃을 새로 심었답니다.
기존에 수목원을 빛내주던 꽃들과 새로운 꽃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쟁하듯 꽃 향연을 펼쳐 나갈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꽃밭……. 바로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초보수목원장은 오늘도 봄꽃들 노니는 수목원을 거닙니다.
가족단위로, 친구끼리 수목원을 찾은 분들이 꽃을 찾고 있습니다.
"봄 꽃 잘 보셨어요?" "아니요. 꽃이 어디 있어요?" "여기요.
이 꽃은 설강화라고 합니다.
그리고 저 쪽 양지언덕에 핀 노란 꽃은 크로커스구요" "어머,, 우리는 이 길로 지나왔는데도 꽃을 못 보았는데……."

봄은 낮은 곳에서부터 옵니다.
봄꽃은 낮은 자세로 피어납니다.
봄꽃을 찾으시는지요?
먼저 무릎을 꿇으세요. 머리를 숙이세요.
봄은 낮은 곳으로부터 온답니다.

- 천리포수목원 원장 조연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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