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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러운 문화유산, 한복의 유래
고구려 무덤 벽화로 본 삼국시대
한복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공존하던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처음 한복의 흔적을 발견한 것은 고구려 시대의 왕과 귀족의 무덤속 벽화에서였다.
벽화에는 일반적으로 남성과 여성이 모두 저고리에 해당하는 긴 상의와 바지나
치마를 입고 있으며, 그 위에 예의나 격식을 갖추기 위해 두루마기형 포를 덧입은
모습을 찾아볼수 있는데, 이 시기의 기본적인 복식의 유형인 것으로 추정된다.
상의와 하의는 다른색을 사용해 장식 표면이 분할 된 듯 보인다.
특히 상의의 깃, 앞단, 밑단 등 의복의 가장자리에 의복보다 짙은 색의 넓은 선 장식을
대준것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선 장식은 착용자의 상의에 시선을 집중시키고,
돋보이게 하기 위함과 동시에 착용자의 전체 모습에서 공간이 나뉜 듯한 기하학적인
이미지를 나타내는 것이 특징. 또한 의복의 가장자리를 튼튼하게 하거나 더러움을
방지하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도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의복의 표면에는 작은 점 무늬를 표현한 것도 보이는데 이것은 당 시대의 직물 문양에
쓰인 다양성 장식문양을 단순하게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한편, 삼국시대의 의복의 재료인 직물이 크게 발달해 견직물만해도 주, 능, 사, 라등으로
다양하게 생산되었고, 모직물도 전,백류, 포등 여러가지가 생산되었다.
이 시대의 또 다른 주요한 특색은 국가 체제의 확립과 더불어 계층화된 신분제도로써
복식도 일부 특권층의 것과 일반 서민의 것에 차등을 두어 귀족복과 서민복으로
나뉘게 되었다는 점이다.
외국의 유행을 받아들인 통일신라시대
통일신라시대의 복신문화는 백제, 고구려, 그리고 당의 문화를 많이 수용했다.
그런 이유로, 의복의 형태는 우리고유의 양식과 중국에서 들여온 외래양식으로
구성된 복식의 이중 구조현상이 나타난다, 한 예로 이 시기에는 우리 고유 의복의
목선인 직령(곧은옷깃)과 외래 복식의 단령(둥근옷깃)을 모두 사용한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통일신라 말기에는 정치적으로 혼란해지기 시작하면서부터 복식생활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백성의 복식이 사치스러워졌고, 예절에 어긋나는 경향마져
띠게 되었다.이로 인해 문란해진 복식문화를 바로잡기 위해 834년에 복식금제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이러한 법령으로 다스려야 할 정도로 사치스러웠다는 것은 그만큼
복식의 재료가 앞 시대보다 풍부해졌고, 그 양식도 화려하게 변화해갔다는 것을
의마한다, 실제로 통일 신라시대에는 저고리, 바지 그리고 포로 대표되는 우리 고유의
복식외에 단령, 복두(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썼는데 주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홍패를 받을 때 쓴 것), 반비(소매가 없거나 짧은 옷), 배당(소매가 없는 윗옷),
표(여인이 목 뒤에서 가슴앞으로 길게 드리우던 일종의 목도리)등의 새로운
복식이 등장하기도 했다.
'무용총'. 삼국시대에는 벽화에 보이는 춤추는 사람들처럼 때에 따라 소매길이를 바꾸기도 했으며, 포는 남자와 여자 모두 입은 것으로 보인다. 포는 처음에는 추위를 막으려고 입었지만 차츰 의례용으로 쓰임새가 바뀌어 귀족이 즐겨 입는 겉옷이 되었다.
외국의 옷을 우리옷으로, 고려시대
고려의 정치적인 대회관계는 고려의 복식제도에도 3기에 해당하는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제1기 - 오나라와 송나라의 영향을 받아 변화
제2기 - 원나라의 침입으로 몽고 복식의 영향을 받아 변화
제3기 - 명나라의 영향권에 들면서 변화했다. 그러나 이런 대외적인 영향은 주로 관복 제도의
변천을 가져왔을 뿐, 일반 복식은 우리 고유의 복식 구조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고려시대의 복식 생활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문익점에 의한 목면의 전래였다. 이것이 비단이나
명주를 마음대로 입을 수 없던 서민의 복식 생활에 커다란 전환기를 마련해 주었다.
우리 옷의 멋과 꾸밈, 조선시대
현재의 한복 모습이 정착된 시기는 바로 조선시대이다. 남자는 바지와 저고리에 두루마기,
여자는 치마와 저고리의 기본형이 서민복으로 이어져왔다.
저고리 길이가 길고 여유있는 형태였으나 임진왜란 이후 작고 짧은 저고리에 풍성한 치마.
웅장한 머리모양등 하루상박의 전통 한복미가 나타났다. 특히 조선시대의 유교 영향으로
현세에서 부귀와 장수를 누리고 자손이 번창하기를 바라는 마음과 자연을 사랑하는 소박하고
꾸밈없는 마음이 복식 곳곳에 나타나 있었다. 한 예로 다남(多男)을 기원하는 길상 문양을
새긴 박쥐 노리개등을 장식으로 몸에 지니고 다니거나 신부가 입는 혼례복의 하나인 활옷의
경우 다홍색 비단 바탕에 장수를 뜻하는 십장생,
부귀를 뜻하는 모란꽃과 연꽃,
길상을 나타내는 만복지원(萬福之原)등의 문자,
권세를 뜻하는 봉황등을 수 놓았는데 조선시대 사람이 염원했던 바를 충분히 읽을 수 있다.
또, 예를 갖추어 의관을 정제하고 넓은 소매의 백색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자연 속으로
사라지는 선비의 자태에서는 호탕한 풍류와 청렴결백, 그리고 절개을 지님과 동시에
자연과 합일하려고 한 남자의 멋을 느끼게 한다.
한편, 조선시대 화가 혜원 신윤복이 그린 조선 말기의 풍속화에 나타난 여인의 모습은
매우 선정적이다, 저고리는 가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좁고 짧으며 소매도 몸에 밀착된다.
반면 상체는 극히 작게 표현된 것에 비해 하체는 겹겹이 껴 입은뒤 그 위에 폭 넓고
긴 치마를 살짝 둘러 입음으로써 우아한 자태와 율동미를 충분히 나타내주고 있다.
긴 치마를 대청마루에서는 그대로 잘잘 끌리게 입었고, 길을 다닐 때에는 치맛자락을
저고리 위까지 추켜 여밈으로써 늘어지는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이는 한복만이 지닐 수
있는 단순한 조형에서 우러나오는 아름다움이요, 다양하게 연출되는 율동미의 극치라
할 수 있다. 외출할 때는 여기에다 쓰개치마나 장옷을 입어 감추면서 비밀스럽고
은근한 멋을 한껏 풍겼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복식은 단순하고 소박한 형태이면서도
입는 방법에 따라 다양한 연출의 아름다움이 있었으며, 장옷이나 쓰개치마에서 동양적인
윤리관념이 담긴 신비로은 은폐의 미가 있었다.
넘 길어서 다음 번에 또 다시...................
참고도서(한국인의 옷, 밀알) , <자연을 닮은 우리 옷 한복>(한솔수북), <전통한복의 멋 노리개>(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고구려 무덤 벽화로 본 삼국시대
한복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공존하던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처음 한복의 흔적을 발견한 것은 고구려 시대의 왕과 귀족의 무덤속 벽화에서였다.
벽화에는 일반적으로 남성과 여성이 모두 저고리에 해당하는 긴 상의와 바지나
치마를 입고 있으며, 그 위에 예의나 격식을 갖추기 위해 두루마기형 포를 덧입은
모습을 찾아볼수 있는데, 이 시기의 기본적인 복식의 유형인 것으로 추정된다.
상의와 하의는 다른색을 사용해 장식 표면이 분할 된 듯 보인다.
특히 상의의 깃, 앞단, 밑단 등 의복의 가장자리에 의복보다 짙은 색의 넓은 선 장식을
대준것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선 장식은 착용자의 상의에 시선을 집중시키고,
돋보이게 하기 위함과 동시에 착용자의 전체 모습에서 공간이 나뉜 듯한 기하학적인
이미지를 나타내는 것이 특징. 또한 의복의 가장자리를 튼튼하게 하거나 더러움을
방지하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도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의복의 표면에는 작은 점 무늬를 표현한 것도 보이는데 이것은 당 시대의 직물 문양에
쓰인 다양성 장식문양을 단순하게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한편, 삼국시대의 의복의 재료인 직물이 크게 발달해 견직물만해도 주, 능, 사, 라등으로
다양하게 생산되었고, 모직물도 전,백류, 포등 여러가지가 생산되었다.
이 시대의 또 다른 주요한 특색은 국가 체제의 확립과 더불어 계층화된 신분제도로써
복식도 일부 특권층의 것과 일반 서민의 것에 차등을 두어 귀족복과 서민복으로
나뉘게 되었다는 점이다.
외국의 유행을 받아들인 통일신라시대
통일신라시대의 복신문화는 백제, 고구려, 그리고 당의 문화를 많이 수용했다.
그런 이유로, 의복의 형태는 우리고유의 양식과 중국에서 들여온 외래양식으로
구성된 복식의 이중 구조현상이 나타난다, 한 예로 이 시기에는 우리 고유 의복의
목선인 직령(곧은옷깃)과 외래 복식의 단령(둥근옷깃)을 모두 사용한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통일신라 말기에는 정치적으로 혼란해지기 시작하면서부터 복식생활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백성의 복식이 사치스러워졌고, 예절에 어긋나는 경향마져
띠게 되었다.이로 인해 문란해진 복식문화를 바로잡기 위해 834년에 복식금제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이러한 법령으로 다스려야 할 정도로 사치스러웠다는 것은 그만큼
복식의 재료가 앞 시대보다 풍부해졌고, 그 양식도 화려하게 변화해갔다는 것을
의마한다, 실제로 통일 신라시대에는 저고리, 바지 그리고 포로 대표되는 우리 고유의
복식외에 단령, 복두(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썼는데 주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홍패를 받을 때 쓴 것), 반비(소매가 없거나 짧은 옷), 배당(소매가 없는 윗옷),
표(여인이 목 뒤에서 가슴앞으로 길게 드리우던 일종의 목도리)등의 새로운
복식이 등장하기도 했다.
'무용총'. 삼국시대에는 벽화에 보이는 춤추는 사람들처럼 때에 따라 소매길이를 바꾸기도 했으며, 포는 남자와 여자 모두 입은 것으로 보인다. 포는 처음에는 추위를 막으려고 입었지만 차츰 의례용으로 쓰임새가 바뀌어 귀족이 즐겨 입는 겉옷이 되었다.
외국의 옷을 우리옷으로, 고려시대
고려의 정치적인 대회관계는 고려의 복식제도에도 3기에 해당하는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제1기 - 오나라와 송나라의 영향을 받아 변화
제2기 - 원나라의 침입으로 몽고 복식의 영향을 받아 변화
제3기 - 명나라의 영향권에 들면서 변화했다. 그러나 이런 대외적인 영향은 주로 관복 제도의
변천을 가져왔을 뿐, 일반 복식은 우리 고유의 복식 구조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고려시대의 복식 생활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문익점에 의한 목면의 전래였다. 이것이 비단이나
명주를 마음대로 입을 수 없던 서민의 복식 생활에 커다란 전환기를 마련해 주었다.
우리 옷의 멋과 꾸밈, 조선시대
현재의 한복 모습이 정착된 시기는 바로 조선시대이다. 남자는 바지와 저고리에 두루마기,
여자는 치마와 저고리의 기본형이 서민복으로 이어져왔다.
저고리 길이가 길고 여유있는 형태였으나 임진왜란 이후 작고 짧은 저고리에 풍성한 치마.
웅장한 머리모양등 하루상박의 전통 한복미가 나타났다. 특히 조선시대의 유교 영향으로
현세에서 부귀와 장수를 누리고 자손이 번창하기를 바라는 마음과 자연을 사랑하는 소박하고
꾸밈없는 마음이 복식 곳곳에 나타나 있었다. 한 예로 다남(多男)을 기원하는 길상 문양을
새긴 박쥐 노리개등을 장식으로 몸에 지니고 다니거나 신부가 입는 혼례복의 하나인 활옷의
경우 다홍색 비단 바탕에 장수를 뜻하는 십장생,
부귀를 뜻하는 모란꽃과 연꽃,
길상을 나타내는 만복지원(萬福之原)등의 문자,
권세를 뜻하는 봉황등을 수 놓았는데 조선시대 사람이 염원했던 바를 충분히 읽을 수 있다.
또, 예를 갖추어 의관을 정제하고 넓은 소매의 백색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자연 속으로
사라지는 선비의 자태에서는 호탕한 풍류와 청렴결백, 그리고 절개을 지님과 동시에
자연과 합일하려고 한 남자의 멋을 느끼게 한다.
한편, 조선시대 화가 혜원 신윤복이 그린 조선 말기의 풍속화에 나타난 여인의 모습은
매우 선정적이다, 저고리는 가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좁고 짧으며 소매도 몸에 밀착된다.
반면 상체는 극히 작게 표현된 것에 비해 하체는 겹겹이 껴 입은뒤 그 위에 폭 넓고
긴 치마를 살짝 둘러 입음으로써 우아한 자태와 율동미를 충분히 나타내주고 있다.
긴 치마를 대청마루에서는 그대로 잘잘 끌리게 입었고, 길을 다닐 때에는 치맛자락을
저고리 위까지 추켜 여밈으로써 늘어지는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이는 한복만이 지닐 수
있는 단순한 조형에서 우러나오는 아름다움이요, 다양하게 연출되는 율동미의 극치라
할 수 있다. 외출할 때는 여기에다 쓰개치마나 장옷을 입어 감추면서 비밀스럽고
은근한 멋을 한껏 풍겼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복식은 단순하고 소박한 형태이면서도
입는 방법에 따라 다양한 연출의 아름다움이 있었으며, 장옷이나 쓰개치마에서 동양적인
윤리관념이 담긴 신비로은 은폐의 미가 있었다.
넘 길어서 다음 번에 또 다시...................
참고도서(한국인의 옷, 밀알) , <자연을 닮은 우리 옷 한복>(한솔수북), <전통한복의 멋 노리개>(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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