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료실

왜 논농사 인가?

320x100

                                    왜 쌀농사인가

아라원의 농사는 일차적으로 벼농사에 집중되어 있다.  아라원의 벼는 외부와 격리된 환경 속에서 벼 고유의 성정이 최대한 발현되도록 하기 위하여 무경운으로 직파되고 무농약 무비료로 자라날 것이다.  그러나 아라원이 무농약 등속보다 더 관심을 가지는 것은 쌀 자체이다.물론 농약 - 농업용 독약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일본의 한 역학조사는 살포된 지 한 달이 넘은 그라목손이라는 제초제의 분진이 한 임산부의 종아리를 통하여 침입, 태반에 도달하여 기형아를 낳게 한 비극적인 사건을 보고하고 있다.  그것이 어찌 태반에만 도달할 것이며 농약이 그라목손만 있을 것인가마는, 그렇다고 농약이 무소불위의 불가항력적인 것은 아니다.
모든 생물은 조직적 완결체이며 모든 시스템은 그 완성도가 도전받을 때마다 완성을 향하여 응전한다.   작물 또한 기본적인 방호물질과 체계를 가지고 있다.  외부의 공격을 받아 그것만으로 방어되지 않을 때는 공격의 속성을 분석하여 곧바로 새로운 방호물질을 합성해낸다.  그마저 되지 않아 절대절명의 벼랑으로 몰리게 되면  그 상황정보를 입력하여 신속히 종자를 맺고 주변의 다른 개체들에게 그 사실을 전파한 후 다음을 기약하며 사멸한다.
사람은 식물보다 활씬 높은 강도의 유전자단위, 조직단위,기관단위, 시스템단위 등의 복합적인 방호체계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무한대의 외부물질과 조건을 동원할 수 있는 능동성을 가지고 있다.  농약은 물론 척결해야 하는 것이지만 몸 밖의 모든 것이 유해요소가 될 수 있음을 감안하면 이러한 신체 시스템의 역동성을 확보하는 것은 훨씬 중요한 것이 된다.  요즘처럼 신체적 불균형과 무능력이 부각되는 시점에서는 더욱 더 그러하다.  
이것에 대하여 동의보감은 ‘사람의 정(精)과 기(氣)는 다 쌀에서 나오고 그래 그 글자에 모두 쌀 미 자 米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맑고 튼튼한 정기는 생명의 기틀이며 동의보감류의 쌀은 대체가능한 단순한 먹을 거리가 아니라 바로 내 몸이다.  그리하여 아라원은 쌀 자체에 주목하게 된다.  
쌀은 우리의 주식(主食)이지만 주식이라 하는 것이 비단 가장 용이하게 가장 많이 생산되어 먹는 양이 가장 많은 식료를 칭하는 것만은 아니다.  주식은 필수 영양소의 공급원일 뿐만 아니라 자연환경적 특성을 가장 정확히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하여 그것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능력까지 가지고 있는,갓난 아이의 모유와 같은 대체 불가능한 것이다(현대과학은 아직 모유의 합성은 물론 그 생화학적 구조마저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한때 신진대사능력을 회복 촉진한다고 해서 녹즙 열풍이 분 적도 있었지만 그것의 본질적인 모습은 주식에 있다.  광우병이 초식동물인 소에게 가축내장 등의 도축부산물을 섞은 육식성 사료를 먹인 탓으로 추정됨을 상기하면 주식의 생리학적 위치가 얼마나 엄중한 것인가를 우리는 숙고해야 한다.   나아가 주식의 문제는 비단 먹을 거리의 차원에서 끝나지 않는다.  
과거 세기 아프리카에 침입한 유럽 열강들이 아프리카인들의 주식인 타피오카(카사바)를 자기네의 가축 사료로 빼앗아 감과 동시에 그들의 재생산 기반을 허물어 아프리카를 구조적으로 장악하기 위하여 밀의 우수성을 역설하면서 밀을 주식으로 강요한 역사가 있었다. 그로 부터 아프리카는 열사를 뚫고 진보해온 신체적 전통을 잃었고 밀림과 사반나의 심장을 뒤흔든 영혼의 문화에서 비켜서야 했다.  우리에게도 또한 5,60년대 PL 480호라는 괴이한 미국공법에 따라 원조물자라는 미명으로 쏟아져 들어온 밀가루의 역사가 있다.  당시의 정권은 미국을 오히려 앞질러 얼마나 요란한 밀가루 예찬 퍼레이드를 펼쳤던가.  키도 커지고 머리도 좋아진다던가 ….   그 때의 아이들은 은연중에 쌀보리를 먹어온 우리 조상들이 다 미개인인 것으로 생각하곤 했었다.  그로부터 우리는 자청하여 자본주의 재생산의 근간인 일차산업과 그에 근거한 이차산업을 파괴하고서 스스로 후진국이 되었고 5천년 내지 9천 몇 백년의 우리 역사의 노하우를 잃었다.     동의보감이 사람의 기(氣)와 정(精)은 다 쌀에서 나오고 ---라고 까지  적고 있는 바에 목숨 자체와 그 목숨의 질을 물질적으로 담보하는 쌀농사에 우리의 역사 전통의 역량이 집중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효를 중심한 사회관과 철학,문화장치,과학 등 모든 분야는 쌀과 연관된 하나의 그물망이다.  이러한 개념이 사라진 오늘 우리에게 쌀밥은 빵이나 핏자처럼 매우 석연치 않은 나의 입맛이 고르는 단순한 매뉴의 하나일 뿐이다.  쌀이 제아무리 기와 정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내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면 그럴 수 밖에 없다. 대단히 부정적인 플라시보효과이다.  과자를 많이 먹어 밥을 먹지 않는 아이들에 대해선 근심하면서 나 자신은 고기를 많이 먹고 배부르다 하여 밥을 먹지 않는 것이 뿌리 뽑힌 우리의 자화상이다.   여기에서 아라원은 쌀에 다시 한번 주목한다.   아라원이 보는 쌀은 철학과 과학이며 문화이며 우리의 힘이다.  그것을 확보하기 위하여 쌀의 내면에 주목할 것이며 그것은 자기부정에서 출발한다.  쌀에 등을 돌린 우리의 의식과 정서를 세밀히 분석하고 이를 극복할 여러 수단과 방법이 동원될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의 존재적 위상에 즉각적으로 부합하는 쌀을 내놓게 될 것이며 이를 통하여 우리는 정신적으로 보다 자유롭고 풍족해 질


                              누가 농사를 짓겠는가

우리나라 농가 호당 평균 경지면적은 4천여평 정도, 이 중 논이 3천여평이고 여기서 얻게 되는 연간 총소득은천만원쯤 된다.  이것은 토지이용료 등의 경비와 자기노동비가 포함된 것으로 농약 비료 등 현금을 주고 구입한 재료비만 제외했을 때도 760만원, 월 65만원꼴이다. 물론 1인당이 아닌 가구당 소득이다.  어느 실험적 조사에 의하면 중견 부부가 부지런히 지을 수 있는 적정 농경면적은 2천평이었다고 한다.  3천평에 월 65만원 소득이라. 뙤약볕에 시커멓게 타고 흙탕물에 온몸을 적시면서 하늘이 노래지도록 일을 해서 농가가 벌어 들이는 것은 노동단체가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하는 정부 산정의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액수이다.  우리나라의 단위면적당 쌀생산량이 국제적으로 상당히 높은 수준이니 기술적인 문제가 크다고 할 수도 없는 바다. 돈 버는 것이 애국이라 호언되고 있는 요즘 세태에 비견하면 농민은 꽤나 비애국적인 셈이다.  더구나 쌀값이 싸다고 할 수 없는 도시의 경제적 하층민이 수백만 명을 헤아리고 있으니 도덕적으로도 내놓을 것이 없게 되는 것이 우리 농민들이다. 비싼 쌀을 생산하고 그 자신은 돈에 허덕이고 패션이라든가,인터넷,PDA 등의 요즘의 문화현상에서 본질적으로 매몰될 수 밖에 없는 생활환경, 천대받는 직업의 자괴감, 지속적으로 줄어가는 1인당 쌀소비량, 시장도착가격이 3만원 정도 밖에 안된다는 수입대기 중인 중국산 쌀 - - - 이러니 누가 농사를 짓겠는가라는 말은 절로 나온다.
그럼에도 쌀은 위대한 것이다.  한변 몸 안에 들어 가면 물과 탄산가스 외에는 배출되는 것이 없을 정도로 사람의 신체적 양상에 가장 잘 부합하는 분자 구조를 가진 복합탄수화물, 최량의 식물성 단백질과 지방,B 1,2,3,6,15,17,C,E,L 등의 복합 비타민군, 칼슘,칼륨,나트륨,마그네슘, 인 등의 미량원소, 올레익산,리놀레익산, 팔미틱산 등의 불포화 지방산으로 구성된 지질, 아라비녹실랜,매라토닌,휘친산,토코페롤,셀레늄,오리자놀,사이토스테롤,베타시스테롤 등 항암,해독,면역,항산화,항콜리에스테롤물질, 세포벽을 구성하고 수은,카드뮴 따위의 유해 중금속을 제거하는 다량의 식이섬유 등 최고의 효율을 가진 요소들이 가장 고르게 분포하고 단위면적당 생산량은 밀보다 두 배,에너지 생산량은 세 배나 많고 가장 긴 재배역사를 가지고 있으면서  연작의 부작용이 없어 가장 많은 종족들이 주식으로 삼고 있는 것이 쌀이다.
나아가 여름철의 우리의 물논은 소양강 등 다목적 댐 전체의 3배가 넘는 양의 물을 가두어 홍수를 막아 주며  거기서 생산되는 단위면적당 유효산소량은 아마존 밀림보다 많다.  서울 목동이 장마철만 되면 홍수의 위험에 시달린 것은 주변을 흐르는 안양천변의 논을 없애 시가지로 만든 탓이었음을 상기하자.
그러나 그것만이라면 아침에는 빵과 우유를 먹고 부족한 필수 아미노산은 고기에서 비타민은 다른 채소에서 보충하면서 부지런히 수출하여 번 돈으로 여기저기 다목적 댐을 만들고 알라스카산 산소캔을 들이 마시면 될 법도 하리라.   사람은 음식을 통하여 영양소만 먹는 것이 아니다.   동의보감은 이에 대하여 너무도 간결하게 단언한다.  사람의 정(精)과 기(氣)는 다 쌀에서 나오고 그래 그 글자에 모두 쌀 미자 米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사람의 정과 기는 모두 쌀에서 나온다

우리나라,중국,일본 등 한자문화권(한자문화권이라 하여 중국문화권과 혼동하지는 말자.  한자 자체가 예서(隸書)란 말에 나타나 듯이 중국 진나라 시절 만리장성을 쌓는 노역의 대부분을 떠안고 있었던 당시의 패망족인 우리 동이족 노예들을 부리기 위해 그들이 사용하던 글을 받아들인 것에서 비롯한다.  한자를 창시했다고 하는 창힐이 중국 지나족인가 우리 동이족인가 하는 것은 논증의 여지가 있을 수 있으나 문자라 하는 것이 이미 축적되어 있는 문화를 표현 전달 계승하고자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맥락에서 볼 때 한자가 지니고 있는 개념들은 최초의 완성된 지나족 국가인 주나라 이전, 혹은 은나라 내지는 은나라 이전에 확립된 개념들이고 다만 이것들이 후대 중국의 한자를 통하여 동양의 각국,각 왕조에 교류된 것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정(精)기(氣)신(神)은 중국의 도가(道家)에 있어서도  가장 기초적인 개념이고 우리의 선도(仙道)에 있어서도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 되어 있는 바이다.)에서 정(精)기(氣)신(神)은 인생의 본질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정은 사람의 물질적 요소에 대(代)하는 것으로 본질적으로 신에 의하여 그 의의가 현창되는 것이고, 신은 그 정신적 영적 요소에 대하는 것으로 정에 의지하여 에너지 준위를 높여 나가며, 기는 이 양자 간을 연결하는 양상에 대하는 것으로 정으로 하여 신을 북돋우고 신으로 하여 정을 키우는 역할을 한다.  곧, 정과 기는 사람을 이루는 양대 지주의 하나인 몸을 내부와 외형에서 떠받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정과 기를 만드는 쌀은 사람의 에너지 형태에 가장 합당하게  몸이라는 물질적 구조를 확대재생산해 내고 이 구조체를 영적 에너지에 연결하는 힘까지 길러내는 양날의 보도인 셈이다.  정이 약하면 종래는 신과의 연결이 끊어지고 이를 우리는 죽음이라 부르며, 기가 약하면 정이 흐트러지고 우리는 이를 병이라 한다.   병과 죽음이야말로 인간사에 있어 중대사 중의 중대사이다.
동의보감은 이 중대사에 대하여 물질적으로 담보해주는 것이 바로 쌀임을 생화학적 측면에서 적시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철따라 입맛 맞는 음식을 먹는다 해도 그것이 정을 돋우고 기를 키우는 것이 되지 못한다면 부질없는 살집만 늘어서 정은 허물어져 성인병 등속의 것이나 들먹여질 것이고, 기는 거칠어 지고 신은 몽매해질 것인데, 극단적으로 상정하여 쌀을 아무리 많이 먹는다 해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1인당 연간 쌀소비량이 130킬로그람 이상 나가던 것이 지금은 90키로 대로 떨어지고 한 때는 이런 현상이 현대화됨을 나타내는 것이라 칭송해마지 않기도 했는데, 지금 서양에서는 오히려 쌀이 건강식품인가로 인정되어 그 소비량이 늘어간다던가.  예의 정과 기  운운하는 것은 쌀을 비단 건강 운운의 차원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한자문화권에서 보는 사람의 몸이라 하는 것은 음과 양의 기운을 가장 구족(俱足)하게 갖춘 회로 집적체이다. 그 회로의 일부분이 빠졌을 때 빠진 부위에 따라 어떤 집적체는 뱀의 형상이 되고, 또 어떤 것은 신갈나무의 형상으로, 어떤 것은 돌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달리 말하면 어떤 특정한 일부의 기운만을 받아 돌이 되고 풀이 되고 짐승이 되는 것이며, 사람은 각각의 분야를 담당하는 오장육부를 통하여 여러 기운을 두루 받아들여 사람이라는 몸의 형상을  (동의보감.탕액편)갖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사람을 지존의 존재로 봄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단지 물질세계 내에서의 이야기이고, 오히려 더 주목할 것은 정 기 신이 깃든 몸을 가진 사람의 단계에 와서야  비물질 적, 비가시적 세계를 포함하는 우주의 전면에, 불가(佛家)식 표현을 빌리면 차원을 달리하는 천상(天上)과 천하(天下)의 경계선,존재의 임계면(臨界面)에 비로소 서게 된다는 점이다.  이제야 천상으로의 폭발적 상승을 노릴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세계에서 모든 물질적 존재는 사람의 형상을 갖지 않고서는 이러한 상승을 이룰 수 없다.  심지어 과거생에 이미 천상의 높은 단계에 도달한 바 있는 싯달다 태자도 최고의 경지를 이루기 위해 마야부인의 태를 빌려 사람의 형상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라더포드의  감마선을 이용한 원자변환실험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돌이 종래는 꽃이 될 수는 있으나 돌이 천상으로 곧바로 도달하지는 못한다.
그래 한자문화권의 모든 물질적 존재는 사람의 형상을 갖기 위하여 갖은 우여곡절을 겪게 되는 것이리라.  천년 묵은 여우가 사람 천 명을 잡아 먹고자 한다는 이야기나 용이 되고자 했던 이무기의 전설 또한 이러한 맥락의 것이다.  어느 누가 말했던가.  한 덧없는 나무조각이 가이 없는 바다를 물결따라 떠다니는데  바다밑을 헤매 다니는 외눈박이 거북이가 나무에 나있는 구멍 사이로 고개를 내밀기도 매우 지난한 일이지만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은 이보다 백천만 배 어려운 일이라고.  우리의 세계는 사람몸을 받으려는 이 어렵고 애절한 소망으로 가득했으며 우리 문화의 우수도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고 우리의 모든 역사장면은 필경 이것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한자문화권에서 몸이라는 것은 사회의 기본 덕목인 효(孝)와 직결되어 있었다.



                                효자는 쌀이 만든다

효라고 하면 옛말의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부터 생각날 법하나 흔히 거기엔 가장 중요한 주석이 빠져 전해지기 십상이다.  그것은 단순히 부모가 주신 몸을 귀히 여기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문화개념에서 효는 전 인간사의 목표이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濟家治國平天下) 식의 것을 위한 전제가 아니다.
효는 국가와 정치체제에 우선하는 것으로 효가 그것들을 유지하게 하는 기초적 도덕항목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이 효를 이루게 하는 시대적 장치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국가나 체제,윤리,도덕은 모두 효를 지향한다.  이애 이르지 못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배격당한다. 한자문화권에서의 모든 반역의 이데올로기 또한 일단 이에 준한다.  구한말 의병연합군의 총사령인 이인영 장군이 일본군이 들끓는 서울로의 진공을 목전에 두고 부친상을 당하여 귀향해버린 사건은 하나의 극적인 예이지만  조선시대애 아무리 중요한 국사가 있다 하더라도 부모에 관한 일이면 사직이 용인되는 일을 상기하면 효의 본래적 의의의 일단을 유추할 수 있다.   효는 먹여주고 입혀 가르쳐준 부모에 대한 부채의식이 아니다. 먹여주고 입혀주는 것 등은  부모가 아니라도 하는 수가 있고, 또한 그 은공에 대한 것을 효라 칭하지는 않는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부패한 지방 귀족의 연합정권이었던 조선의 정치권력이 왕권에 우선하는 이데올로기를 만듣어 내기 위해 효의 의의를 농단한 탓에 유가(儒家)의 본래적 의미가 일정 부분 왜곡된 바가 있지만 불가(佛家)나 도가(道家)에서도 - 정치권력의 슬로건이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어쩌면 유가보다 더 신중하게- 효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부모은중경에서는 어버이를 즐겁게 하기 위해 왼쪽 어깨 위에 아버지를 오른쪽 어깨 위에 어머니를 모시고 수미산이 다 닳도록 돌아도 그 은혜의 백만분의 일도 갚지 못한다 하였고 도가의 도장(道臧)에도 비슷한 장면이 있다.
이것은 무엇보다 삼라만상의 모든 것들이 그토록 애절하게 갈구해 마지 않는 사람의 몸을 다름아닌 우리의 부모조상이 주었기 때문이다.  이 몸이 있슴으로 하여 우리는 모든 존재의 표상인 구경지(究景地)에 도달할 수 있고 제아무리 불구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만물의 원기(原器)인 정 기 신이 있으매  세상에 이보다 더 심대한 선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기에 부모가 자식에게 아무리 악행을 저지른다 하더라도 자식이 부모를 훼손한다는 것은 존재 단위가 저지를 수 있는 일 중에서도 가장 나쁜 것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출발하는 것이 효이다.  따라서 효는 윤리강령이 아니라 세계관이다.
서양세계에는 사람몸에 대한 이와 같은 인식이 없기 때문에 효의 개념도 없는 것이며 이것이 사라진 오늘의 우리 세계에서도 효라는 것이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준 것 등에 대한 단순한 차원의 어쩌면 조금은 고리타분한 것으로 떨어져 버렸고 당연한 결과로 부모조상에 대한 원혐이 있게 되는 것도  있을 수 있는 감정 정서로 인정되는 경우가 있게 되었다.  나아가 이 세계관을 소홀히했을 때 왕검조선이 붕괴했고 이 세계관을 부정했을 때 한자문화권은 서세동점의 근대세계에 봉착하였다

                    
                        쌀을 먹어야 성인 현자가 될 수 있다

몸의 세계관에 기반한 효가 대내적으로 부모 조상에 대한 숭경으로 표현된다고 한다면, 대외적으로는 이 몸을 기반으로 한 활동에 의하여 완성된다.  그 귀결점을 유불선(儒佛仙) 3교에서는 성인(聖人),군자(君子), 부처,진인(眞人) 등으로 표현하고 이러한 면모는 사회 전반을 규정해나간다.  석가나 예수,공자 등이 숭모받는 것은 단순히 자비나 사랑이나 인의예지 등의 인격적 품성때문만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모두 분열과 탄압이 낭자하여 희망이 보이지 않는 세상에 대하여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정책방향과 수단을, 그것도 가장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바를 제시하였다는데 있다.
석가는 윤회의 역사관으로 세상사를 분석하여 분란의 근본원인을 추출한 토대 위에서 6바라밀 등의 처방을 제시,수행하였고, 예수는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하는 바 칼은 또다른 칼을 낳을 뿐이매 원수를 사랑하는 칼을 넘어선 전략적 세계관을 가질 때 칼의 뿌리를 뽑을 수 있음을 보았던 것이다.  우리 역사의 환인이나 환웅,단군 왕검 역시 전혀 그러하다.
이러한 이들이 제시한 온 세계의 구경처는 의연히 모든 사람의 사표가 되는 것이며, 그것에 도달하기 위한 사회적 역동성을 우리는 정치라 칭한다.  우리 고사(古史)에 나타나는 바의 군왕의 지위 역할 역시 성인 군자 등의 세간적 표현이며 정치 또한 구성원 전체의 그러한 도덕적 상승을 지향하고 있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단군조선시대의 그러한 체계를 수두교(소도,蘇塗)라 하였고 그 수련과졍의 정점에 있는 이를 단군이라 한다 하였다.


따라서 문화 규범도 그것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장치에 근거한다.  일군의 현대물리학자들이 인지하였듯이 심지어 바둑이나 제기차기,  연날리기 등의 유희 조차도 그러했다.   24절기나 세시풍속에 눈을 돌리면 그것은 더욱 확연하다.  흔히 우리의 세시풍속이 자연계의 흐름을 단계적으로 포착 분석하여 당시의 주업이었던 농사일의 기술적 단계에 원용하고 농업노동조직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여러 문화장치를 구비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고, 따라서 농업인구가 10%미만으로 떨어진 오늘날에는 기후 날씨 정도의 의미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본래는 우주의 기운과 가장 원활하게 교류하는 사람 몸의 에너지장을 파악하는 각 시점의 기준이었음을 상기하자.  가령, 입춘이라고 하면 봄에 들어서는 길목이라는 말뜻이겠다.  하지만, 시황경 315도의 2월 초순의 추운 날씨는 봄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 땅 속에서 잠자던 벌레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며 물고기가 얼음 밑을 돌아다니기 시작한다는 토가 달려 나온다.  우리는 사람보다는 짐승이 자연현상에 더 민감하기에 그럴 수도 있겠거니 생각하고 만다.  그러나 짐승들은 기껏 서식 생태계 범위 정도의 변화에 대한 식(識)만 계발되어 있는 존재이고 그것도 그 존재에 전면적인 영향과 지배를 받는 것이라면, 사람은 사주(四柱)의 천문학이 제시하듯 이 지구 밖의 에너지에 대해서 까지도 교감하며 그러한 반응 요소들도 하부의 신체 기관 단위에서 처리하는 수준에 이른 존재인 것이다.
옛글에 이르기를 상사(上士)는 입동에 집을 떠나 입춘에 돌아 온다 하였다.
겨울은 만유의 기틀인 수기(水氣)의 계절이다.  이 시절이 되면 해가 지고 밤이 되면 그러 하듯, 다른 장부(臟腑)는 뒤로 물러서고 수기의 군왕인 콩팥이 온 몸을 주관하여 일년 내내 흐트러졌던 정기를 추스리고 맑은 기운을 되세우게 된다.  콩팥의 수기는 화기(火氣)인 의식(意識)의 활동력을 담보해주는것이지만, 물과 불이 그러 하듯 화기인 생각과 감각을 싫어한다. 그러기에 콩팥의 계절인 겨울이 오면 집을 떠나 눈덮힌 깊은 산속의 부드러운 정적이 제격인 칩거에 들어 가고, 산골짜기 두꺼운 얼음벽의 밑바닥을 가르는 진동이 동면 짐승들의 내장에 메아리치는 입춘이 되어 물러섰던 다른 장부를 콩팥이 흔들어 깨우면, 그애 맞춰 다시 집으로 돌아 오는 것이 사람의 으뜸가는 모습인 상사가 살아가는 바라는 것이다.  이쯤되면 입춘대길의 축문은 앞으로 잘 되어달라는 기원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잘 되게 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끝났다는 포고문인 셈이며, 입춘대길을 잊고서 우리나라 겨울이 춥다고 파타야로 푸켓으로 돌아 다니는 것은 언 땅속의 개구리만도 못한 것이 되는 것이 아닌지 모른다 .  이러한 것은 오월 단오나 칠월 칠석이나 다 마찬가지이다.
이렇듯 사회의 모든 요소가 사람의 몸이라는 데서 출발하는 세계에서, 입춘이나 칠석 등이 몸에 대하여 주변적이고 이차적인 것이라면 주식(主食)은 보다 직접적이고 주체적인 수단으로 자리한다.  정 기 신을 담고 있는 몸이라는 그릇에서는 물 한 모금에 대해서도 즉각적인 반응이 포착된다.  하물며 항상 먹는 주식에 있어서랴.  한자문화권에서는 먹는 것의 문제가 신(神)의 상승에 가장 큰 걸림돌의 하나인 사람의 탐욕심과도 매우 밀접한 것이기에, 주식으로 삼고자 하는 것은 지극히 정밀한 계측을 거쳐 선정될 바이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 고기를 많이 먹으면 성정(性情)이 거칠어진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또한 여러 의서들도 식료들에 대하여 그것의 영양소가 어떠한지에 대한 표현은 거의 없고 그것들이 우리의 성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논의를 주로 삼는다.
이는 이 세계가 지향하는 바를 다시 한번 반증한다.  이 세계에서는 배두드리며 호의호식하기 위하여 먹을 것을 고르지 않는다.  9만 6천 키로의 미로와 같은 혈관을 도는 혈액이 필경 심장을 지향하듯 단군이나 대장장이나 모두 한 길을 간다고 할 때, 먹는 것의 문제를 식약(食藥)이라 표현하는 바도 그것이 하는 역할에 대한 정밀한 인식의지를 반영한다.  이는 언제나 몸 속을 돌고 있으면서 우리가 구경처로 상승하는 과정의 적소적시에서 밀고 당기는 작용을 하며 부단히 정 기 신을 향하는 그것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며, 거기에 바로 우리의 쌀이 있다.
  동북아시아에서도 밀이나 기장은 장구한 재배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구태어 쌀을 으뜸으로 치게 된 주된 연유는 무엇보다도 이런 면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동의보감이 말하는 정과 기는 신(神)의 상승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쌀이 그것의 물질적 기초이자 첨병으로 역할함을 ‘ 정과 기는 다 쌀에서 나오고 --- ’등으로 표현한 것이다.   물론 쌀은 영양학적으로 대단히 우수한 식품이지만 영양은 그것을 구성하는 하위단위의 한 요소일 뿐이다.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자면 필요한 요소는 쌀 자체로서가 아니라, 쌀이 몸안에 들어가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김치에는 콜리에스테롤을 제거하는 성분이 있는데, 그것은 고추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생고추에는 없는 것이며, 다만 김치가 숙성해갈 때 그 조건에서 고추가그 성분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는가.  고추를 어찌 쌀에 비교하랴.

   몸의 세계관을 완성함에 있어 쌀은 이와 같은 결정적 요소의 하나이며,그래 우리 세계에서는 단군도 대장장이도 쌀을 먹었던 것이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그리하여 온갖 번다한 세상사로 기운이 흐트러질 때 오장육부를 순화하여 심신을 안정시키며 파, 마늘, 고기 등 기운이 편중되거나 잡스러운 요소가 많은 여러 식료들을 정 기 신의 관점에서 분류 재편성하여 간에 들어갈 것은 간에, 피부로 나아갈 것은 피부로, 버려야 될 것은 몸 밖으로 내보내는 신체 시스템을 구축하고, 또한 그것을 통하여 넘치고 모자라는 것에 대한 정확한 인지능력을 유지하며, 나아가 극심한 기갈에도 견딜 수 있는 근골의 힘을 비축하게 함으로써 언제나 맑고 여유롭고 힘있는 인간의 품성을 유지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단재 선생이 언급하는 수두 체제도 침략당할 수 없는 국가적 위력을 발휘하였고 군사력과 경제력, 문화역량에서 모든 주변국이 스스로 조복하게 되는 고대 동북아시아 평화의 핵심을 이루었던 바이다.
   쌀이 이와 같은 데 쌀을 적게 먹고 고기나 밀가루 음식의 소비가 기하급수적으로 느는 오늘의 우리 현실은 어쩌면 한없이 지속되는 평화에 나태해져서 그 평화가 몸의 세계관, 수두의 수련체계에서 나오는 것임을 잊고 닦음을 게을리 하게 됨으로써 도전받는 일이 생겨나고 패하는 전쟁도 있게 되면서 급속히 붕괴해간 단군조선의 비운에 비견할 만한 것으로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른다.
   총명(聰明)이라는 말이 있다.  총명은 그 어감만큼이나 맑으면서 예리하며 또한 힘있고 다정하며 어여쁨의 정조를 품고 있다.  총은 귀밝을 총이요, 명은 눈밝을 명이다.  총명은 귀 밝고 눈 밝아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고, 앞으로도 무한히 알아낼 수 있으며, 그것들은 모두에게 더없이 유용한 것이 되리란 기대가 서려 있다.  그래 어린 아이에게 잘 쓰는 말이다.  총명한 아이가 우리의 희망이듯 우리의 쌀은 과거 우리 민족의 영화를 열었고 오늘 나의 인생을 윤택하게 할 것이다.  그것은 베타시스테롤 같은 항암물질이 아니라도, 휘친산 같은 해독물질이 아니라도, 콜리에스테롤을 증가시킬 우려가 없는 단백질이 아니라도 쌀에는 우리를 가이 없는 총명한 사람으로 살아 가게 할 몇 천 년의 염원과 위력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벼가 자라서 우리의 아리따운 자식들에게 맑고 힘찬 자양을 주게 하소서.  이 벼가 자라서 덧없이 기력이 희미해져 가는 우리의 어버이들을 청춘의 빛 속에 다시 서게 해 주소서.  이 벼가 자라서 지난 가뭄에 유리걸식해야 했던 사람들이 평화를 얻게 해 주소서.  이 벼가 자라서 몽매한 변방족들이 지혜의 세계를 맛보게 해 주소서. 나는 이 밥을 먹어 어제의 힘든 노동을 이기고 주위의 모든 이들을 위무할 힘을 갖게 되리라. 나는 이 밥을 먹어 나의 헛된 망념의 뿌리를 뽑고 나의 한 생이 나아갈 바를 햇빛에 반짝이는 아리수의 물빛처럼 언제나 마음에 간직하게 되리라.
   벼를 보면서 밥을 먹으면서 이루어졌던 낱낱의 염원은 탄수화묽과 단백질과 베타시스테롤 등과 함께 쌀 안에 물리화학적으로 축적되어 있다.(1996년 호주의 한 법의학연구소는 사람이 접촉한 것에는 반드시 DNA내지  DNA흔적이 남아 있으며 그것은 어떠한 화학물질로도 부식 파괴되지 않는다는 실험결과와 임상 사례를 보고하고 있다.  그 이전의 또 다른 과학자는 사람이 지나가거나 거처한 곳에는 그 사람 특유의 진동에너지- 모든 사물에는 고유의 진동에너지가 있다 - 가 남아 있고 그 자리를 폭약으로 폭파해도 에너지는 남아 있으며 다른 에너지가 거기에 중첩되면 그들간에 또다른 반응을 한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한자문화권에서야 그 사실은 어제 오늘의 지식이 아니다.  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더구나 말고 밝은 것에 있어서랴.  다만 변화하거나 다만 보이지 않을 뿐이다.)
   아라원은 이를 가시화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갓난 아이는 오장육부의 타고난 부조(不調)의 틈새를 메꾸면서 몸을 키워가고, 음양의 극성이 팽배한 소년소녀들은 그 기운을 온후하게 순치시키며, 넘치는 신체적 힘을 작은 세계에 쏟아 붇고 좌충우돌하는 청년들에겐 영적 물적인 의식계를 넓혀주며, 벌써 신체기관의 여러 곳이 허물어져 정신의 힘이 끌어 내려진 연배들에겐 청춘의 빛을 되세우게 할 그러한 쌀이 나오게 하기 위하여 여러 과정과 방법 수단이 동원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아라원 재배학’이라는 체계로 요약하고 있다.  거기엔 밝은 노동과 관조하는 응시가 있고 벼에 공명하는 정미한 음악이 세밀하게 배치될 것이다.  물론 제초제를 포함한 농약은 사용하지 않는다.  화학비료는 첫농사인 탓으로 하여 농촌진흥청 권장량의 1/4정도를 사용하였지만 앞으로는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지형지리적인 여건은 맑은 물과 공기를 제공해준다.  이제 아라원은 쌀농사를 통하여 우리의 수많은 문화적 선열들이 나아가고자 했던 세계를 다시 보게 될 것이며 병과 비애와 애증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여러 이웃들에게 무엇인가 줄 수 있는 것을 준비한다는 희망에 이 산골짜기의 거친 생활을 만끽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 --- 긴 한숨이 나온다.  농민들은 쌀 때문에 삶의 구렁텅이에 빠졌고 그 구렁텅이 옆에서 우리는 새로이 쌀에 주목한다 하고 있으니, 세상사의 질곡은 언제 그 끝을 보여줄 것인가. .

320x100

'자료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망초와 개망초!!!  (0) 2005.10.18
자생식물?? 귀화식물??  (0) 2005.10.18
나무의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  (0) 2005.10.18
여진구 선생님 학교 방문  (3) 2005.10.17
나무는 얼마나 오래살까???  (0) 2005.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