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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죽나무 / 도종환 가죽나무 / 도종환 나는 내가 부족한 나무라는 걸 안다 내 딴에는 곧게 자란다 생각했지만 어떤 가지는 구부러졌고 어떤 줄기는 비비 꼬여 있는 걸 안다 그래서 대들보로 쓰일 수도 없고 좋은 재목이 될 수 없다는 걸 안다 그 꽃 보며 기뻐하는 사람 있으면 나도 기쁘고 내 그늘에 날개를 쉬러 오는 새 한마리 있으면 편안한 자리를 내주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내게 너무 많은 걸 요구하는 사람에게 그들의 요구를 다 채워줄 수 없어 기대에 못 미치는 나무라고 돌아서서 비웃는 소리 들려도 조용히 웃는다 이 숲의 다른 나무들에 비해 볼품이 없는 나무라는 걸 내가 오래 전부터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 한가운데를 두 팔로 헤치며 우렁차게 가지를 뻗는 나무들과 다른 게 있다면 내가 본래 부족한 나무라는 걸 안다는 것뿐이다 그러.. 더보기
목백일홍 / 도종환 목백일홍 / 도종환 피어서 열흘 아름다운 꽃이 없고 살면서 끝없이 사랑 받는 사람 없다고 사람들은 그렇게 말을 하는데 한여름부터 초가을까지 석달 열흘을 피어 있는 꽃도 있고 살면서 늘 사랑스러운 사람도 없는 게 아니어 함께 있다 돌아서면 돌아서며 다시 그리워지는 꽃 같은 사람 없는 게 아니어 가만히 들여다보니 한 꽃이 백일을 아름답게 피어 있는 게 아니다 수없는 꽃이 지면서 다시 피고 떨어지면 또 새 꽃봉오릴 피워올려 목백일홍나무는 환한 것이다 꽃은 져도 나무는 여전히 꽃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제 안에 소리없이 꽃잎 시들어가는 걸 알면서 온몸 다시 꽃을 피워내며 아무도 모르게 거듭나고 거듭나는 것이다 더보기
배롱나무 / 도종환 배롱나무 / 도종환 배롱나무를 알기 전까지는 많은 나무들 중에 배롱나무가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장 뜨거울 때 가장 화사한 꽃을 피워놓고는 가녀린 자태로 소리없이 물러서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남모르게 배롱나무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 뒤론 길 떠나면 어디서든 배롱나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지루하고 먼길을 갈 때면 으레 거기 서 있었고 지치도록 걸어오고도 한 고개를 더 넘어야 할 때 고갯마루에 꽃그늘을 만들어놓고 기다리기도 하고 갈림길에서 길을 잘못 들어 다른 길로 접어들면 건너편에서 말없이 진분홍 꽃숭어리를 떨구며 서 있기도 했습니다 이제 그만 하던 일을 포기하고 싶어 혼자 외딴섬을 찾아가던 날은 보아주는 이도 없는 곳에서 바닷바람 맞으며 혼자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꽃은 누구를 위해서 피우는 게 아니라고.. 더보기